
에베소서 5장 22~33절 ② 사랑받고 있는데도 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는 사랑보다 요구가 먼저 나오는가
사랑받음을 알기 → 기대와 실망을 다루기 → 상대를 세우는 사랑으로 살아가기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우리는 가장 많은 것을 기대합니다.
내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랍니다.
말하지 않아도 이해해 주기를 바랍니다.
내가 힘들 때 먼저 알아차리고,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반응해 주기를 기대합니다.
그런데 가까운 사람이 그 기대에 맞지 않으면 서운함도 커집니다.
“이 정도는 알아줘야 하는 것 아닌가?”
“내가 얼마나 했는데 왜 저 사람은 이럴까?”
그러다 보면 사랑보다 요구가 먼저 나오기 시작합니다.
에베소서 5장 22~33절은 이런 관계를 다시 그리스도에게로 데려갑니다.
사랑의 출발점은 상대의 반응이 아닙니다
25절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 교회를 위하여 자신을 주심 같이 하라.”
그리스도의 사랑은 상대가 먼저 잘했기 때문에 시작된 사랑이 아닙니다.
교회가 완벽했기 때문에 사랑하신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가 먼저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이것이 관계를 바라보는 기준을 바꿉니다.
우리는 쉽게 이렇게 생각합니다.
“저 사람이 나에게 잘하면 나도 잘하겠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은
“상대의 반응 이전에 내가 어떤 사랑을 받은 사람인가”
를 먼저 보게 합니다.
요구가 커지는 이유는 사랑이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일 수 있습니다
사람은 마음이 비어 있다고 느낄 때 가까운 사람에게 더 많은 것을 요구할 수 있습니다.
“나를 인정해 줘.”
“나를 이해해 줘.”
“내 편이 되어 줘.”
이 요구 자체가 모두 잘못은 아닙니다.
가까운 관계에서 이해와 사랑을 바라는 것은 자연스럽습니다.
문제는 그 사람이 내 존재의 부족함을 모두 채워 주어야 한다고 생각할 때입니다.
배우자나 가족이 나의 가장 깊은 빈자리를 채워야 하는 사람이 되면 관계가 점점 무거워집니다.
에베소서는 그 빈자리의 근원을 다시 그리스도에게 돌립니다.
나는 먼저 그리스도께 사랑받은 사람입니다.
사랑은 상대를 바꾸는 기술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하면 상대가 변할 것이라고 기대할 수 있습니다.
“내가 이렇게 해 주면 저 사람도 달라지겠지.”
그런데 상대가 변하지 않으면 사랑한 것까지 억울하게 느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은 거래가 아닙니다.
사랑은 상대를 조종하기 위한 방법이 아닙니다.
사랑은 내가 받은 은혜를 흘려보내는 방향입니다.
그래서 사랑의 질문도 달라집니다.
“이렇게 하면 저 사람이 어떻게 반응할까?”
보다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신 방식이라면 나는 오늘 어떻게 행동할까?”
를 묻게 됩니다.
사랑은 상대를 약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세웁니다
26~27절에서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깨끗하게 하고 거룩하게 하며 영광스럽게 세우시는 모습이 나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상대를 살리고 세우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부부와 가까운 관계에서도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내 말은 상대를 세우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 기대를 관철하기 위해 상대를 작게 만들고 있습니까?
“당신은 왜 항상 그래?”
“당신은 절대로 안 변해.”
이런 말은 순간적으로 내 감정을 표현할 수는 있지만 상대의 존재 전체를 판단하는 말이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따라간다면 잘못은 말하되 사람 전체를 무너뜨리지는 않습니다.
한 몸이라는 것은 상대의 아픔이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뜻입니다
28절에서 바울은 아내를 사랑하는 것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31절에서는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라고 합니다.
한 몸이라는 말은 단지 결혼의 친밀함만 말하지 않습니다.
상대의 아픔이 나와 무관하지 않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내 말로 상대가 계속 상처받고 있다면 결국 관계 전체가 약해집니다.
상대가 지쳐 있는데도 내 요구만 계속하면 한 몸 전체가 지칩니다.
그래서 사랑은 묻습니다.
“이 관계가 살아나기 위해 지금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사랑은 먹이고 돌봅니다
29절에서 바울은 두 가지 행동을 말합니다.
양육하고
보호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그렇게 대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큰 이벤트보다 일상의 작은 돌봄에서 나타날 수 있습니다.
상대의 말을 끝까지 듣는 것,
힘들어하는 일을 알아주는 것,
수고를 인정해 주는 것,
내가 잘못했을 때 먼저 사과하는 것,
상대가 쉴 수 있도록 작은 일을 대신하는 것.
이런 일들이 관계를 먹이고 돌보는 사랑이 됩니다.
사랑받은 사람은 요구만 하는 자리에서 조금씩 내려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마음에 자리 잡기 시작하면 상대에게 아무 기대도 하지 않는 사람이 되는 것은 아닙니다.
대신 기대가 관계의 주인이 되지 않게 됩니다.
내가 필요한 것을 솔직히 말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상대가 그것을 완벽하게 채워 주지 못했다고 해서 그 사람 전체를 정죄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내 존재의 가장 깊은 근거는 상대의 반응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사랑에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랑받은 사람은
“당신이 나를 채워 줘야 해.”
에서 조금씩 벗어나
“나는 받은 사랑으로 당신을 어떻게 살릴 수 있을까?”
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한 가지 요구를 한 가지 사랑으로 바꾸어 봅니다
오늘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가지고 있는 기대 하나를 떠올려 봅니다.
“나를 알아줬으면 좋겠다.”
“먼저 연락해 줬으면 좋겠다.”
“내 마음을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
그 기대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다만 그 옆에 질문 하나를 붙여 봅니다.
“나는 오늘 이 사람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먼저 들어 줄 수 있습니다.
감사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수고했다고 인정할 수 있습니다.
내가 잘못한 부분을 사과할 수 있습니다.
작은 도움 하나를 줄 수도 있습니다.
사랑은 요구가 사라지는 일이 아니라 받기만 하려던 방향이 주는 방향으로도 열리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5장 22~33절에서 바울은 계속 부부 관계를 그리스도와 교회에 비추어 봅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의 사랑이 상대의 반응만 바라보면 쉽게 흔들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큰 사랑을 먼저 봅니다.
그리스도가 사랑하셨습니다.
자신을 내어 주셨습니다.
먹이고 돌보셨습니다.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마지막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가까운 사람에게 사랑을 주기보다 먼저 내 기대를 채워 달라고 요구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리고 한 걸음 더 묻습니다.
그리스도께 받은 사랑을 기억한다면, 오늘 나는 가장 가까운 사람을 어떻게 살리고 세울 수 있을까요?
사랑은 상대가 완벽해질 때 시작되는 것이 아닙니다.
먼저 사랑받은 사람이 그 사랑을 오늘의 관계 속에서 흘려보내는 데서 시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