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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하나님을 섬긴다면서 가까운 사람에게는 내 뜻을 강요할까?|에베소서 6장 1~9절

말씀쉼터 2026. 11. 5. 1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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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6장 1~9절 ② 하나님을 섬긴다면서 왜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는 내 뜻을 강요하게 되는가

주님을 바라보기 → 권위를 맡은 책임으로 알기 → 사람을 살리는 관계로 살아가기

우리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합니다.

교회에서는 부드럽게 말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고,

기도할 때는 하나님의 뜻을 구합니다.

그런데 집에 돌아오면 달라질 때가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는 쉽게 명령합니다.

자녀가 내 뜻대로 움직이지 않으면 화가 납니다.

가족이 내 기대를 따라주지 않으면 답답합니다.

직장에서도 내가 책임을 맡고 있다는 이유로 사람을 밀어붙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질문이 생깁니다.

“나는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면서 왜 가까운 사람에게는 내 뜻을 이루려 하는가?”

에베소서 6장 1~9절은 이 문제를 관계의 중심에서 다시 봅니다.

모든 관계 위에는 한 분 주님이 계십니다

1절에서 자녀에게

“주 안에서 부모에게 순종하라”

고 말합니다.

그리고 5절 이후에는 일하는 사람에게

“그리스도께 하듯 하라”

고 합니다.

9절에서는 권위를 가진 사람에게도

“너희와 그들의 상전이 하늘에 계신다”

고 말합니다.

즉 누구도 관계의 최종 주인이 아닙니다.

부모도 아닙니다.

상사도 아닙니다.

책임자도 아닙니다.

모두 위에 주님이 계십니다.

이 사실을 잊으면 맡은 권한을 내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기 쉽습니다.

하지만 주님을 기억하면 권위의 의미가 달라집니다.

권위는 사람을 움직이는 힘이 아니라 살리는 책임입니다

우리는 권위를 가지면 쉽게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 말을 따라야 한다.”

“내가 책임자니까 내가 결정한다.”

그러나 바울은 부모에게 먼저 경고합니다.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라.”

왜 이런 말을 했을까요?

권위를 가진 사람도 관계를 깨뜨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권위가 크면 책임도 커집니다.

내 말 한마디가 상대를 세울 수도 있고,

오랫동안 마음에 상처를 남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맡기신 권위는

내 뜻을 관철하기 위한 권리보다 사람을 살리고 세우기 위한 책임에 가깝습니다.

부모의 목적은 복종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4절에서 바울은 자녀를

“주의 교훈과 훈계로 양육하라”

고 말합니다.

여기에서 중심은 양육입니다.

양육은 사람을 내 모습대로 만드는 일이 아닙니다.

그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건강하게 자라도록 돕는 것입니다.

부모가 모든 답을 대신 결정해 주면 자녀는 부모의 뜻에는 익숙해질 수 있지만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판단하는 힘은 자라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부모의 질문도 달라질 필요가 있습니다.

“왜 내 말을 안 듣지?”

보다

“이 아이가 하나님 앞에서 건강하게 자라려면 지금 무엇이 필요할까?”

를 묻습니다.

때로는 가르쳐야 합니다.

때로는 경계를 세워야 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기다려야 하고, 들어 주어야 합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내 뜻을 강요하는 이유

가까운 사람에게는 기대가 큽니다.

“내 가족이니까 이 정도는 해야지.”

“내 자녀니까 내 말을 이해해야지.”

“같이 일하니까 내 방식에 맞춰야지.”

그러다 보면 사랑보다 통제가 앞설 수 있습니다.

통제는 불안을 줄여 줍니다.

내 뜻대로 움직이면 마음이 편합니다.

하지만 상대가 내 뜻과 다르게 움직이는 순간 불안해집니다.

그래서 더 강하게 말합니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상대를 한 사람으로 보기보다 내 기대를 수행해야 하는 사람으로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에베소서는 그 시선을 다시 주님께 돌립니다.

그 사람의 주인도 내가 아닙니다.

하나님입니다.

일터에서도 사람보다 주님을 바라봅니다

6절에서 바울은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라”

고 합니다.

사람의 눈만 바라보면 두 가지 방향으로 흔들릴 수 있습니다.

아랫사람은 평가받기 위해 움직입니다.

윗사람은 사람을 평가하는 힘으로 통제하려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둘 다 주님을 바라보게 합니다.

일하는 사람은

주께 하듯 성실하게 일합니다.

권위를 가진 사람은

하늘에 계신 주님 앞에서 사람을 대합니다.

이렇게 되면 관계는 힘의 경쟁이 아니라 맡겨진 책임의 자리로 바뀝니다.

“위협을 그치라”는 말은 매우 현실적입니다

9절에서 바울은 상전들에게

“위협을 그치라”

고 말합니다.

위협은 꼭 큰 소리를 내는 것만이 아닙니다.

“내 말 안 들으면 두고 봐.”

라는 직접적인 말일 수 있습니다.

무시하는 태도일 수도 있습니다.

평가와 보상을 이용해 사람을 움직이는 방식일 수도 있습니다.

가정에서도 비슷합니다.

사랑을 거두겠다는 듯한 태도,

비교,

수치심을 주는 말이 사람을 움직이는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위협으로 키우지 않으십니다.

은혜와 진리로 부르십니다.

그렇다면 권위를 가진 사람도 같은 방향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을 바라보면 상대를 소유하지 않게 됩니다

자녀는 내 소유가 아닙니다.

배우자도 내 욕구를 채우기 위한 사람이 아닙니다.

함께 일하는 사람도 내 성과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모두 하나님께 속한 사람입니다.

내게 맡겨졌을 수는 있지만 내 것이 아닙니다.

이 사실을 기억하면 관계가 조금 자유로워집니다.

내가 모든 것을 통제해야 한다는 부담에서도 내려올 수 있습니다.

상대방도 하나님께서 가르치고 자라게 하실 수 있다는 것을 믿게 됩니다.

권위 아래 있는 사람도 사람의 인정에 매이지 않습니다

이 말씀은 권위를 가진 사람에게만 해당하지 않습니다.

일하는 사람에게도 중요한 자유를 줍니다.

사람이 나의 수고를 알아주지 않을 수 있습니다.

부모가 자녀의 노력을 몰라줄 수도 있습니다.

상사가 성실함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때 바울은 말합니다.

“주께 하듯 하라.”

내 수고의 의미가 사람의 칭찬에만 달려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인정이 없더라도 하나님 앞에서 성실하게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사람에게 이용당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부당한 일에는 필요한 대응이 있어야 합니다.

다만 내 존재의 가치와 내 수고의 의미를 사람의 평가에만 맡기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오늘은 가장 가까운 관계 하나를 돌아봅니다

오늘 내가 가장 많이 명령하거나 요구하는 사람을 떠올려 봅니다.

자녀일 수도 있습니다.

배우자일 수도 있습니다.

함께 일하는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에게 묻습니다.

“나는 이 사람을 하나님께 맡겨진 사람으로 보고 있는가, 아니면 내 뜻을 따라야 할 사람으로 보고 있는가?”

그다음 한 가지 행동을 바꾸어 봅니다.

명령하기 전에 이유를 설명할 수 있습니다.

먼저 상대의 말을 들어 볼 수 있습니다.

잘못을 지적하기 전에 잘하고 있는 것을 인정할 수도 있습니다.

내 방식만 옳다고 생각했다면 다른 방법이 가능한지 물어볼 수 있습니다.

내가 잘못했다면 먼저 사과할 수도 있습니다.

이런 작은 변화가 권위를 통제에서 돌봄으로 바꾸기 시작합니다.

에베소서 6장 1~9절은 관계의 질서를 없애지 않습니다.

부모와 자녀가 있고,

맡기는 사람과 맡은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관계보다 위에 한 분 주님을 세웁니다.

그래서 누구도 사람을 함부로 대할 수 없습니다.

누구도 자신의 권위를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오늘의 마지막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받은 권한과 책임을 사람을 움직이기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 사람을 하나님 앞에서 살리고 세우기 위해 사용하고 있습니까?

그리고 한 걸음 더 묻습니다.

내가 그 관계의 주인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인이시라는 사실을 믿는다면, 오늘 내 말과 태도는 어떻게 달라질까요?

그리스도인의 권위는 사람 위에 서는 힘이 아닙니다.

주님 아래에서 사람을 살리고 세우도록 맡겨진 책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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