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베소서 4장 1~6절 ① 부르심에 합당하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부르심·걸음·겸손·하나 됨 — 받은 은혜에서 삶이 시작됩니다
에베소서 1장부터 3장까지 바울은 긴 시간 동안 하나님이 하신 일을 이야기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셨습니다.
자녀로 삼으셨습니다.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하고 용서하셨습니다.
성령으로 인치셨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습니다.
멀리 있던 사람들을 가까이하시고, 서로 막혀 있던 담을 허무셨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고 하나님의 충만으로 채워지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4장에 들어서면서 문장의 방향이 달라집니다.
바울은 처음으로 본격적인 삶의 요청을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이 한 단어가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앞에는 세 장의 은혜가 있습니다
4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Παρακαλῶ οὖν ὑμᾶς
파라칼로 운 휘마스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바울은 아무 근거 없이
“이제부터 잘 살아라”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앞에 “그러므로”가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러므로입니까?
1~3장에서 하나님이 이미 이루신 모든 일 때문입니다.
순서는 이렇게 됩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
하나님이 주셨습니다
↓
하나님이 살리셨습니다
↓
그러므로 이제 그렇게 받은 사람답게 걸으십시오
기독교의 삶은 명령에서 시작하지 않습니다.
은혜에서 시작합니다.
바울은 “행하라”보다 “걸으라”고 말합니다
1절에는 에베소서에서 중요한 동사가 다시 등장합니다.
περιπατῆσαι
페리파테사이
‘걷다’, 곧 ‘살아가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말을 2장에서 이미 만났습니다.
과거에는 허물과 죄 가운데 걸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살리신 뒤에는 하나님이 미리 준비하신 선한 일 가운데 걷도록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이제 4장에서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가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걸으라.”
신앙은 한 번의 큰 결심보다 매일 어느 방향으로 걷고 있는가와 연결됩니다.
‘합당하게’는 은혜의 값을 갚으라는 뜻이 아닙니다
바울은
ἀξίως
악시오스
곧 ‘합당하게’ 걸으라고 말합니다.
이 말을 잘못 읽으면 부담이 생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이만큼 해 주셨으니 이제 내가 그만큼 갚아야 한다.”
그러나 은혜는 갚는 순간 은혜가 아닙니다.
‘합당하게’는 하나님께 받은 은혜와 어울리는 삶, 받은 부르심과 조화를 이루는 삶을 뜻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셨다면 사랑받은 사람답게 걷습니다.
용서하셨다면 용서받은 사람답게 걷습니다.
한 가족으로 만드셨다면 다른 사람과 벽만 세우며 살지 않습니다.
삶은 은혜를 얻기 위한 조건이 아니라 이미 받은 은혜의 모양이 됩니다.
첫 번째 모습은 겸손입니다
2절에서 바울이 가장 먼저 말하는 것은 대단한 능력이 아닙니다.
겸손입니다.
ταπεινοφροσύνη
타페이노프로쉬네
자신을 낮게 평가하라는 뜻이라기보다, 자기 자신을 모든 것의 중심에 두지 않는 태도입니다.
왜 은혜를 받은 사람에게 겸손이 생길까요?
지금 내가 서 있는 자리가 내가 만들어 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내가 나를 살린 것이 아닙니다.
내가 나를 하나님의 자녀로 만든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셨습니다.
은혜를 알수록 자랑할 이유는 줄어듭니다.
두 번째 모습은 온유입니다
그다음은 온유입니다.
온유는 힘이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힘이 있지만 그것을 다른 사람을 누르는 데 사용하지 않는 태도입니다.
하나님께 받은 은혜를 아는 사람은 자신의 옳음을 증명하기 위해 모든 사람을 이겨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기다릴 수도 있습니다.
자신이 틀렸다면 인정할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가치가 논쟁에서 이기는 것으로 결정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 번째 모습은 오래 참음입니다
바울은 이어 오래 참음을 말합니다.
공동체에서 이것은 매우 현실적인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한 가족으로 만드셨다고 해서 성격이 모두 같아지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도 다릅니다.
속도도 다릅니다.
성장하는 과정도 다릅니다.
그래서 하나 됨에는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오래 참으셨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도 성장할 시간을 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사랑 가운데 서로를 받아 줍니다
2절 마지막에는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라는 말이 나옵니다.
하나 됨은 상대방의 모든 행동을 옳다고 인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의 부족함이 보인다고 곧바로 관계 밖으로 밀어내지 않는 것입니다.
사랑은 완벽한 사람들끼리 모이는 방법이 아니라,
불완전한 사람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함께 살아가는 방법입니다.
하나 됨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3절은 매우 중요한 표현을 사용합니다.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바울은
“하나가 되어라”
라고 먼저 말하지 않습니다.
이미
성령께서 하나 되게 하셨습니다.
우리에게 맡겨진 것은 그것을 지키는 일입니다.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하나 됨도 우리의 성취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루신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다시 깨뜨리지 않도록 살아갑니다.
왜 우리는 하나입니까?
4~6절에는 ‘하나’라는 말이 계속 반복됩니다.
몸이 하나입니다.
성령도 한 분입니다.
소망도 하나입니다.
주도 한 분입니다.
믿음도 하나입니다.
세례도 하나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곧 만유의 아버지도 한 분입니다.
사람들이 하나인 이유가 서로 잘 맞기 때문이 아닙니다.
같은 취향 때문도 아닙니다.
우리보다 먼저 한 분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 됨의 중심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입니다.
문장의 길을 한눈에 따라가 봅니다
에베소서 4장 1~6절은 이렇게 흐릅니다.
하나님이 먼저 부르셨습니다
↓
그러므로
부르심에 합당하게 걸어갑니다
↓
겸손과 온유로
↓
오래 참으며
↓
사랑 가운데 서로 받아 줍니다
↓
그리고
성령께서 이미 이루신 하나 됨을 지킵니다
↓
왜냐하면
몸도 하나, 성령도 하나, 소망도 하나, 주도 하나, 믿음도 하나, 하나님 아버지도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4장에서 삶의 명령이 시작되었지만 중심은 여전히 변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이 먼저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은혜에 어울리는 길을 걸어갑니다.
오늘의 마지막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사랑받고 받아들여지기 위해 좋은 사람이 되려고 합니까?
아니면
이미 부르심을 받고 사랑받은 사람으로서, 오늘 만나는 사람에게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으로 그 은혜를 보여 주고 있습니까?
신앙의 삶은 은혜를 얻으려는 걸음이 아닙니다.
이미 받은 은혜가 우리의 걸음에서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다음 2편에서는 같은 에베소서 4장 1~6절을 다시 읽으며,
「하나님이 이미 하나 되게 하셨는데 왜 나는 나와 다른 사람을 견디기 어려운가」
라는 질문을 따라가겠습니다.
하나 됨을 믿음으로 나의 것으로 알고, 겸손과 온유와 오래 참음이 실제 관계에서 어떻게 나타나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