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걸 아는데 왜 마음은 자꾸 외로울까?|에베소서 3장 14~21절

에베소서 3장 14~21절 ②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것을 아는데 왜 나는 여전히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끼는가
사랑을 나의 것 알기 → 속사람에서 체험하기 → 오늘의 관계로 살아가기
우리는 “하나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을 잘 압니다.
십자가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도 압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신다는 말씀도 여러 번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마음은 쉽게 흔들립니다.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상처를 받고,
인정받지 못하면 내가 가치 없는 사람처럼 느껴지고,
기도한 일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하나님이 나를 멀리하시는 것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머리로는 사랑을 아는데 마음은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에베소 성도들이 단지 사랑에 관한 지식을 더 많이 갖기를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제로 알게 되기를 기도합니다.
바울은 먼저 속사람이 강해지기를 기도했습니다
16절에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우리의 속사람을 강건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이 순서가 중요합니다.
사람은 마음이 약해질 때 바깥에서 인정받아 자신을 채우려 합니다.
칭찬을 들으면 조금 살아나는 것 같고,
사람들이 나를 필요로 하면 내가 중요한 사람처럼 느껴집니다.
하지만 그 인정이 사라지면 다시 흔들립니다.
그래서 바울은 바깥의 반응보다 더 깊은 곳을 바라봅니다.
속사람이 성령으로 강해져야 합니다.
사람들의 평가가 나를 붙들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시는 힘이 안에서부터 나를 세워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마음에 거하신다는 것은 무엇일까요?
17절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에 계시게 하시옵고”
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가 마음에 거하신다는 것은 단지 “예수님이 내 안에 계신다”는 문장을 아는 것보다 깊습니다.
내가 나를 바라보는 방식,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방식,
두려움이 올라올 때 해석하는 방식에까지
그리스도의 말씀이 머무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거절당했을 때 마음은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나는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야.”
그때 믿음은 감정을 억지로 지우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 말합니다.
“한 사람의 거절이 그리스도께서 나를 사랑하신 사실을 지울 수 없다.”
그리스도가 마음에 거한다는 것은 이런 식으로 하나님의 사랑이 내 해석의 중심이 되어 가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뿌리가 필요합니다
바울은 이어서
“사랑 가운데서 뿌리가 박히고 터가 굳어져서”
라고 말합니다.
나무의 뿌리가 어디에 박혀 있는지가 중요합니다.
사람의 인정에 뿌리를 내리면 사람의 반응에 따라 흔들립니다.
성과에 뿌리를 내리면 실패할 때 존재까지 흔들립니다.
신앙의 성취에 뿌리를 내리면 내가 잘하지 못하는 날 하나님과의 관계까지 불안해집니다.
그러나 바울은 성도의 뿌리가 사랑에 박혀야 한다고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얼마나 사랑했는가가 아니라,
먼저 그리스도가 나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에 뿌리를 내리는 것입니다.
뿌리가 바뀌면 흔들림을 대하는 방식도 달라집니다.
사랑받는다는 것은 항상 좋은 감정을 느낀다는 뜻이 아닙니다
우리는 사랑받으면 언제나 마음이 따뜻하고 편안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실제 삶은 그렇지 않습니다.
사랑받는 사람도 외로울 수 있습니다.
두려울 수도 있습니다.
마음이 답답할 수도 있습니다.
바울이 말하는 사랑의 확신은 감정이 항상 안정되어 있다는 뜻이 아닙니다.
감정이 흔들려도 돌아갈 자리가 있다는 뜻입니다.
“지금 나는 사랑받는다고 느끼지 못한다.”
라고 솔직히 말하면서도,
그다음 문장을 이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은 내 느낌보다 먼저 있었고, 지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믿음은 감정을 없애는 것이 아니라 감정보다 더 깊은 근거를 갖는 것입니다.
왜 바울은 사랑의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를 말했을까요?
바울은 그리스도의 사랑을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
라는 말로 표현합니다.
사랑을 하나의 작은 감정으로 가두지 않는 것입니다.
내가 실패한 자리보다 넓습니다.
내가 오래 품고 있던 상처보다 깁니다.
내가 올라갈 수 없는 자리까지 높습니다.
내가 떨어졌다고 느끼는 자리보다도 깊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안다는 것은
“나는 사랑받는다.”
라는 문장을 반복하는 것만이 아닙니다.
삶의 다양한 자리에서
“여기까지도 하나님의 사랑이 미치는가?”
를 발견해 가는 것입니다.
사랑을 체험하면 다른 사람의 인정이 사라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은 마음 자체가 모두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칭찬은 기쁩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받아들여지고 싶은 것도 자연스럽습니다.
문제는 그 인정이 내 존재의 근거가 될 때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의 뿌리가 되기 시작하면 사람의 인정은 선물이 되지만 생명줄은 되지 않습니다.
누군가 나를 칭찬해도 감사할 수 있고,
칭찬이 없어도 존재가 무너지지 않습니다.
누군가 나를 오해해도 아프지만,
그 오해가 하나님 앞에서의 나의 자리를 바꾸지는 못합니다.
이것이 사랑이 주는 자유입니다.
사랑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붙잡아 소유하려 하지 않습니다
사랑이 부족하다고 느끼면 우리는 다른 사람에게서 그것을 채우려고 할 수 있습니다.
“나를 이해해 줘.”
“나를 인정해 줘.”
“내가 필요한 사람이라고 말해 줘.”
그 요구가 커질수록 관계는 무거워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사랑이 내 안에 조금씩 자리 잡으면 다른 사람을 나를 채우기 위한 도구로만 바라보지 않게 됩니다.
사랑을 받아야만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 받은 사랑을 흘려보낼 수 있는 사람이 되어 갑니다.
그래서 에베소서 4장 이후에 사랑으로 살아가라는 말이 나오는 것도 자연스럽습니다.
먼저 사랑을 알게 하시고,
그다음 그 사랑으로 걸어가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충만은 비어 있는 나를 채우는 방향입니다
19절 마지막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하게 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는 비어 있다고 느낄 때 사람과 성과와 소유로 자신을 채우려 합니다.
하지만 바울은 하나님께서 채우시기를 기도합니다.
이것은 내가 아무것도 필요 없는 사람이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내 존재의 가장 깊은 곳을 사람이 대신 채워야 한다는 부담에서 조금씩 벗어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그리스도가 내 마음에 거하시며,
성령이 속사람을 강하게 하시는 자리에서 관계를 시작할 수 있습니다.
오늘은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순간을 찾아봅니다
오늘 마음이 흔들리는 순간이 있다면 잠시 멈추어 봅니다.
누군가의 무관심 때문일 수 있습니다.
비판을 들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내가 기대한 반응을 받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때 감정을 무시하지 않고 이렇게 말해 봅니다.
“나는 지금 사랑받지 못한다고 느끼고 있다.”
그리고 한 문장을 더 이어 봅니다.
“그러나 내 감정이 그리스도의 사랑의 크기를 결정하지는 않는다.”
그다음 에베소서 3장 18~19절을 천천히 읽어 봅니다.
그 사랑의 넓이,
길이,
높이,
깊이를 생각합니다.
오늘 한 번이라도 사람의 인정보다 그리스도의 사랑을 먼저 기억한다면, 마음의 뿌리는 조금씩 다른 곳으로 내려갈 수 있습니다.
바울은 성도들에게 더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 되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주어진 그리스도의 사랑을 더 깊이 알게 되기를 기도했습니다.
오늘의 마지막 질문은 이것입니다.
나는 사랑받기 위해 계속 사람과 하나님 앞에서 나를 증명하고 있습니까?
아니면
그리스도께서 이미 나를 사랑하셨다는 사실에 뿌리를 내리고 오늘의 관계를 살아가고 있습니까?
사랑은 내가 만들어 내야 하는 자격이 아닙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먼저 주어진 자리이며, 그 자리에서 오늘의 삶이 시작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