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한 가족으로 만드셨는데 왜 우리는 서로 벽을 세울까?|에베소서 2장 11~22절

에베소서 2장 11~22절 ② 하나님이 한 가족으로 만드셨는데 왜 우리는 서로 벽을 세우는가
화평을 나의 것 알기 → 관계에서 은혜를 체험하기 → 오늘 하나 됨을 살아가기
사람은 비슷한 사람과 있으면 편합니다.
생각이 비슷하고, 말이 잘 통하고, 살아온 배경이 비슷하면 마음을 열기도 쉽습니다. 반대로 나와 다른 사람을 만나면 어느 순간 조심스러워집니다.
“저 사람은 나와 달라.”
그 말이 마음속에 자리 잡기 시작하면 작은 차이가 곧 벽이 되기도 합니다.
에베소서 2장 11~22절에서 바울은 훨씬 큰 벽을 바라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의 벽입니다.
오랫동안 서로 다른 역사와 문화와 종교적 배경을 가진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들이 조금씩 서로를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더 강하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막힌 담을 허무셨습니다.
화평은 내가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닙니다
14절에서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그리스도께서 화평을 가르치셨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 자신이 우리의 화평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우리는 관계가 어려워지면 이렇게 생각합니다.
“내가 더 참아야 하지 않을까?”
“내가 더 잘 말해야 하지 않을까?”
“저 사람이 먼저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물론 관계를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에베소서는 우리의 노력보다 먼저 이루어진 일을 바라보게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화평이 되셨습니다.
믿음은 내가 완벽하게 화평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주어진 화평을 받아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같은 아버지께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18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여기에는 놀라운 변화가 있습니다.
전에는 서로를 다른 사람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같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한 성령 안에서
한 아버지께 나아갑니다.
그렇다면 교회 안에서 만나는 사람을 바라보는 질문도 달라질 수 있습니다.
“저 사람은 나와 잘 맞는 사람인가?”
보다 먼저,
“저 사람도 나와 같은 아버지께 나아가는 사람인가?”
를 묻게 됩니다.
같은 아버지를 부르는 사람이라면 관계의 출발점이 취향이나 성격보다 더 깊은 곳에 있습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다시 벽을 세울까요?
그리스도께서 벽을 허무셨는데도 우리는 쉽게 새로운 벽을 만듭니다.
신앙 연수가 다르다는 이유로,
성경을 이해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이유로,
경제적인 형편이 다르다는 이유로,
세대가 다르고 말투가 다르다는 이유로 사람을 나누기도 합니다.
심지어 교회 안에서도
“우리 사람”
과
“저쪽 사람”
을 만들 수 있습니다.
벽을 세우는 마음에는 종종 자기 보호가 있습니다.
상처받고 싶지 않아서 거리를 둡니다.
내가 옳다는 확신을 지키고 싶어서 상대를 멀리합니다.
때로는 내가 더 나은 사람이라는 느낌을 유지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낮게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우리 모두를 같은 자리로 데려갑니다.
은혜가 필요한 사람의 자리입니다.
십자가는 상대를 이기는 장소가 아닙니다
16절은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로
원수 된 것을 소멸하셨다
고 말합니다.
우리는 갈등이 생기면 누가 옳은지를 먼저 따집니다.
물론 옳고 그름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눌러 이기는 방식으로 화평을 만들지 않습니다.
원수 됨 자체를 죽입니다.
그래서 십자가 앞에서는
“누가 이겼는가?”
보다
“이 관계에서 무엇이 우리를 원수로 만들고 있는가?”
를 물어야 합니다.
자존심일 수도 있습니다.
오래된 오해일 수도 있습니다.
인정받고 싶은 마음일 수도 있습니다.
상대가 먼저 사과해야 한다는 마음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사람을 없애시는 것이 아니라 원수 된 것을 없애십니다.
화평을 체험한다는 것은 모든 사람과 가까워진다는 뜻이 아닙니다
화평을 산다고 해서 모든 사람과 깊은 관계를 가져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위험한 관계에는 거리가 필요할 수 있습니다.
반복적인 상처가 있는 관계에서는 경계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경계를 세우는 것과 상대를 미워하며 벽을 쌓는 것은 다릅니다.
화평은 무조건 관계를 이전으로 되돌리는 일이 아닙니다.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지 않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을 하나님께서 다루실 수 있는 사람으로 남겨 두는 것입니다.
나도 은혜로 살아가고 있음을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은 같은 사람들의 모임이 아닙니다
19절은 우리를
“하나님의 권속”
이라고 부릅니다.
가족은 모두 똑같은 사람이 모인 곳이 아닙니다.
성격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고, 역할도 다릅니다.
하지만 한 집에 속해 있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은 서로 다른 사람들을 지우고 똑같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연결하십니다.
그리고 21~22절에서는 그 사람들이 서로 연결되어 하나의 성전으로 자라간다고 말합니다.
돌 하나만으로는 성전이 되지 않습니다.
서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내가 다른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순간, 에베소서가 보여 주는 교회의 그림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오늘은 내가 세운 벽 하나를 찾아봅니다
오늘 관계 하나를 떠올려 봅니다.
내가 마음속으로 이미
“저 사람은 안 돼.”
라고 결론 내린 사람이 있습니까?
그 사람과 반드시 가까워져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이렇게 물어봅니다.
“그리스도께서 허무신 담을 내가 다시 쌓고 있지는 않은가?”
그리고 오늘 할 수 있는 아주 작은 일을 하나 선택합니다.
먼저 인사할 수 있습니다.
상대의 말을 한 번 더 들어줄 수 있습니다.
내가 오해한 부분이 없는지 확인할 수도 있습니다.
사과해야 할 일이 있다면 짧게라도 사과할 수 있습니다.
혹은 아직 가까이 갈 수 없는 관계라면, 미움으로 상대를 붙잡지 않도록 하나님께 맡길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화평을 만들어 내는 거대한 일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화평을 살아내는 작은 걸음일 수 있습니다.
에베소서 2장 11~22절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멀리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막힌 담을 허무셨습니다.
둘을 한 새 사람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한 성령 안에서 한 아버지께 나아가게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오늘의 마지막 질문은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한 가족으로 만드신 사람들 사이에 나는 어떤 벽을 다시 세우고 있습니까?
그리고 오늘 그 벽에서 돌 하나라도 내려놓을 수 있을까요?
화평은 내가 처음 만들어 내는 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신 화평을 오늘의 관계 속에서 살아가는 일입니다.